한달살기 준비

[몰타 한달살기 #11] 폭풍쇼핑과 추풍낙엽(샵사이다 후기)

제이로거듭난피 2023. 6. 21. 0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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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대 과업을 완료한 작년 11월 말, 나는 상당한 여유를 지니고 있었다. 
6개월 전에 절반 이상을 해내다니, 스스로가 자랑스러웠다. 이 정도 시간 여유가 있다면 완벽한 준비가 가능할 것 같았다. 
차근 차근 샅샅이 정보를 찾아보고 매달 조금씩 준비를 해서 몰타 다녀온 그 누구보다 완벽한 상태로 한국을 떠나리라는 포부가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알차고 귀중한 자료들을 욕심쟁이처럼 독식하지 않고 이 블로그에 공유해서 몰타로 떠나는 모든 이들에게 너그럽게 베풀겠다는 긍휼한 마음까지 가졌다. 
지금 생각해보니 6개월 전이라고 해서 시간과 체력이 넘쳐나게 한가했던 것도 아닌데, 난 무슨 뽕이 들었던 걸까... (심지어는 블로그 첫 포스팅도 5월에 간신히 했다)
 
예상 가능한 일일지도 모르지만, 그렇다. 준비는 떠나기 직전까지도 거의 되지 않았다. 
1-3월 사이에 2주 여행을 위한 호텔 예약(로마: 7박, 영국: 4박)과 교통편 예약(유럽 내 국가간 이동 4회)을 마치고 나니까 너무 기력이 소진되어, 다른 건 쳐다보고 싶지도 않아졌다. 
현지인만 아는 맛집이라던가, 알려지지 않은 알짜 포토스팟 같은 걸 알아보기엔 너무 지쳤다. 원래는 이 블로그에 여행 관련 정보도 쓰려고 했는데, 지금은 쓰고 싶지 않다. 여러 호텔을 검색하고 선별하는 과정이 내겐 좀 고통스러웠다. 하나만 말해둔다.
 

"비행기건, 기차건, 호텔이건 일찍해라."

코로나 이전에는 요사스럽게도 가격 변동이 잦아서 시기를 잘 타는 눈치게임에 성공하면 득템이라고 할만한 가격으로 예약하는 게 가능했는데 이제는 그런 거 없다. 오늘이 제일 싸다. 심신을 회복한 후에 자세한 내용을 포스팅할 수도 있지만 핵심은 하나다. 오늘 해라.
 
원래는 섬나라로 가니까 4-5월쯤 수영을 배워서 가려던 계획이 있었는데, 구에서 운영하는 체육센터 수영교실은 나같은 건 감히 넘보지도 못할 속도로 정원이 마감되어 버렸다. 
기왕 어학원도 등록했으니까 가기 전에 영어 회화 연습이라도 좀 하려고 전화 영어를 신청해보려고 했는데 "전화"와 "영어"라는 내가 꺼리는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려니 정신이 아득해져서 도무지 신청 버튼이 눌러지지 않았다. 
심지어는 간단한 이탈리아어 회화도 배워가려는 야심이 있었다. 하하하. 
 
그 상태로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 5월 말이 되었다.
이젠 정말 발등에 불이 떨어져서, 동행인에게 쇼핑을 거의 맡겼다. 여전히 내가 직접 알아보고 싶지는 않았다.
어차피 내가 굵직한 건 다 했기 때문에 쇼핑 좀 맡긴다고 해서 미안한 마음도 없었다. 유심이니 도난방지락이니 하는 것들을 동행인이 사들였다.
다만, 내 옷은 그럴 수 없었다.
진짜 나 어학원 다닐 때 뭐 입지? 
내가 멋쟁이라서 그런 건 아니고, 한달에 4-5번 출근하는 삶을 3년 넘게 살다가 4주 동안 매일 등교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는데 정말로 옷이 없었다. 휴양지에 맞는 룩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5월말부터 출국 3일전까지, 나와 동행인 모두의 폭풍쇼핑이 시작된다. 
 
사들인 물건이 많았지만, 가장 큰 번뇌를 안겨준 건 수영복이었다. 
서양인들은 수영복 팬티 레그라인도 너무 깊고 과감하고, 상의도 찌찌 가리개 수준이며 패드도 없어서 수영복 위로 양각이 도드라지기 때문에 수영복은 한국에서 사오라는 당부가 많았다.
적당히 가리고 덮어줘서 심리적 안정을 주는 동시에 외국에서 입는 만큼 살짝은 핫해보이는 것이면 좋겠다는 양가적인 욕망. 
어차피 다녀오면 입을 일이 거의 없을 것이니, 가격은 1회용에 준하되, 싼티는 안 났으면 하는 효율적 소비 마인드. 
쁘띠하지 않은 내 체격.
고려 사항은 많았다. 그렇지만, 그걸 사러 백화점이든 아울렛이든 가서 수많은 제품 중에 골라서 좁은 탈의실에서 입고 벗고를 반복할 체력이 없다 내겐. 
 
선택의 여지는 없다. 간다. 온라인 쇼핑으로.
 
그러던 와중에 요망한 알고리즘이 내게 던져준 브랜드 샵사이다. 
자본주의 제국 미국의 SPA 브랜드답게 스크롤이 느릴 정도로 제품이 넘쳐나고, 1회용에 준하는 가격이며, 사이즈가 다양했다.
요시 그란도시즌!
일단 괜찮아 보이는 건 무조건 담았다. 사이즈를 가늠하기 힘든 건 고민되는 각 사이즈를 하나씩 담았다. 
수영복만 살 순 없어서 바지, 티셔츠, 원피스 등 다른 옷들도 담았다. 그렇게 50만원어치의 옷이 우리집으로 왔다. 
 

가장 많이 택배가 왔던 출국 일주일 전.

반품하면서 느낄 현타와 죄책감은 일단 접어두기로 했지만, 정작 받고 보니 절반 이상이 추풍낙엽처럼 떨어져 나갈 줄은 상상을 못했지 모야 T_T

일단 원피스는 도저히 여름에 입을 수 없는 재질이어서 반품. 

수영복은... 나름 고심해서 골랐지만 입어보지도 않고도 바로 반품이 결정될 정도로 다리 라인이 깊게 파여 있거나 가슴이 잘 가려지지 않는 것들이 대다수에, 그 중에서 하나 살아남은 것이 가까운 지인의 극렬한 반대로(북한 수영복 같다며...) 모두 반려되었다.

의외로 기본템 바지들이 살아남아서 바지 두어 벌과 티셔츠를 비롯해 반품 불가한 품목을 제외하고 모두 반품되었다. 

요새 유튜버들이 샵사이다 광고 많이 하는데, 암만 휴가지에서 1번 입고 말 옷이라고 해도 걍 자라나 H&M 가십쇼. 

나처럼 국제적인 자원 낭비를 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란다.

 

바쁜 벌꿀은 현타에 빠질 시간도 없다.

다급하게 지인이 추천해준 수영복을 하나 주문하여, 출국 3일 전에 마지막 택배를 받으며 쇼핑 레이스를 마감했다.

지치지만 후련하기도.

 

몰타 여행자들에게 빛과 소금 같은 블로그가 되리라는 마음으로 시작했는데, 이렇게 기빨리는 TMI만 주절거리고 있어서 다소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도(내가 예전에 블로그에서 정보 찾을 때 쓸데없는 잡소리만 하고 있으면 짜증이 났기 때문에...), 사실 정보를 얻고자 하는 의도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미안함을 느낄 필요가 있는가 싶기도 하고....

 

여튼, 준비를 열심히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시작하더라도, 막판이 되면 "닥치면 뭐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바뀌기 때문에... 처음부터 "닥치면 그때 그때 해결한다" 라는 마음가짐을 가지는 것이 스트레스를 덜 받는 길이라는 귀중한 교훈을 남긴다. 1포스팅 1레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