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 전부터 준비한 여정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앞에서 쓰는 걸 까먹었지만 장기 여행을 앞두고 제일 중요한 건, 경거망동하지 않는 것이다.
여행을 목전에 두고 다리가 부러질 수도 있고 키우던 동물이 크게 아플 수도 있다.
나는 밖을 잘 나가지 않는데도, 집에서 넘어져서 이빨을 다친 적도 있고 발가락이 부러진 적도 있다.
동반자가 있는 여행이라면 상대방의 의리와 신의가 시험대에 올라가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
예를 들어, 나의 동행인이 아주 중한 병에 걸린다면 그건 차라리 고민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큰 문제가 없지만 당장 보살핌을 필요로 하고 여행을 떠날 수 없는 상태가 된다면 어떨까?
이를테면, 앞서 이야기했듯이 다리가 부러진다면? 오랜 시간 준비하고 고대해온 여행을 혼자서라도 떠날 것인가, 남아서 상대방을 보살필 것인가.
내 잘못으로 혼자 고꾸라지는 건 그냥 아쉽고 말 일이지만, 내 잘못으로 상대방까지 고꾸라트린다면 두고 두고 사죄해도 돌이킬 수 없는 재앙이 된다.
그래서 나는 여행 전에 알콜 섭취를 최대한 줄였고, 동행인은 격주로 나가던 농구 동호회를 쉬었다. 60대 형님들이 40대 막내를 기다리고 있다고 전해들었지만, 동행인은 나가지 않았다.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출국일을 맞았다.
동행인은 비행기를 타면서부터 몰타에 들어올 때까지의 기간 전체가 극기 훈련 같다고 했지만, 나약해빠진 소리. 여기 출국 전날부터 날밤을 샌 자가 있다. 경험해본 결과 가급적이면 여행 전날에 밤 새는 것을 권하지는 않는다.
출국 전날부터 비행기 이륙까지의 타임라인은 아래와 같다.
마지막 근무일에 사무실에 출근해서 업무 완료하니 5시.
원두 구매에 대해서는 고민이 많았는데, 결국 사가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메쉬에서 원두를 사가기엔 이미 늦은 시간이라, 급하게 성수동에서 서초동 룰커피로 향했다.
거기도 6시면 문 닫기 때문에 인스타 디엠으로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읍소해서 겨우 커피 100그람을 샀다.(정말이지 잘한 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집 근처 유명한 떡볶이 집에서 떡볶이를 산 후 로또를 구입해서 집으로 돌아왔다.
여행지에서 로또가 당첨될 경우 유럽 도둑들이 무서우니 당장 퍼스트클래스를 타고 귀국하여 당첨금을 수령한 후 다시 퍼클을 타고 나가자는 합의가 있었는데 그냥 로또 용지는 사진으로 찍어두고 실물은 집에 두고 가는 것으로 계획을 변경했다.
여행 전 마지막 저녁으로 떡볶이를 먹고 최후의 준비가 시작되었다.
여행가방은 그 전날 대충 싸두었지만, 마지막으로 집안 청소가 필요했다.
한달 동안 동생이 캣시팅을 위해 우리집에서 머물기로 했는데 침구도 세탁하고 옷방도 정리해서 내 동생이 옷을 둘 공간을 마련하고 냉장고도 비우고 우리집 사용 가이드도 작성해야 하고, 때맞춰 고장난 밥솥도 버리고 할 일이 많았다.
모든 걸 다 마치고 나니 이미 새벽시간이라 잠을 포기하고 비행기에서 자기로 했다.
그때까지도 정말 떠난다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렇게 오래 떨어져 있는 게 처음인 우리 고양이에게 인사할 때도 눈물이 날 줄 알았는데 마치 2-3일 뒤에는 돌아올 것 같은 기분이라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나섰다. 대략 새벽 6시 반이 좀 넘은 시간.
보딩 시간은 11시 50분이었으나, 인천공항이 붐빌 것을 대비해서 서울역에서 7시 반 공항열차를 타기로 했다.
그런데 아시아나는 서울역 도심공항에서 체크인이 되네?
서울역 도심공항은 크게 붐비지 않아서 한 15분 내로 체크인이 모두 끝났다. 성수기엔 어떨지 모르겠지만, 도심공항 체크인이 가능하면 미리 하고 가는 게 편할 것 같다.
15만원을 추가하고 앞좌석을 샀더니 수하물도 빨리 나오는 패스 같은 걸 붙여 주었다. 자본주의 대단...
지금 쓰면서 생각해보니 겨우 일주일 전인데 1년 전처럼 아득해서 내가 도심공항에 갔던가 싶다.
인천공항 도착 시간은 8시 반이 조금 넘은 시간이었는데 보딩 시간까지 라운지에서 좀 쉬려고 라운지를 찾아 다녔다.
그런데 내가 가진 신용카드(삼성 앤마일리지 카드)로는 마티나 라운지만 이용 가능해서 마티나 라운지를 찾았다.
원래는 마티나 라운지가 2개 있었는데, 왜 때문인지 하나만 운영하고 있었다.
어찌저찌 겨우 찾아 들어간 마티나 라운지에서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는데...
아침식사 되는 백반집 마냥 사람들이 빡빡하게 들어앉아 식사를 하고 있었다. 쉴 공간은 아예 없다.
혹시라고 나처럼 눈이라도 붙일 목적으로 라운지를 찾는 사람이라면 마티나 라운지는 비추. 그렇다고 밥이 엄청 맛있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동행인은 닭갈비를 엄청 담아와서 먹긴 했다. 맛있더라며...
공항 내 휴식 공간에서 좀 앉아 있다가 면세품 쇼핑한 것들을 찾았다.
예전이라면 해외 여행 나갈 때 화장품을 잔뜩 샀을 건데 환율 때문인지 예전처럼 싸다는 느낌도 없고, 국산 브랜드들이 워낙 좋으니 꼭 사야하는 물건도 없어서, 여행지에서 쓸 것만 간단하게 샀다.
코로나 전에는 면세품 인도장에 중국 보따리상들이 한가득 물건을 사서 바닥에 물건을 늘어놓고 면세품 포장을 뜯는라 바빴는데, 이젠 그런 거 없다. 아마 한중 관광이 재개되더라도 예전처럼 중국에서 한국 화장품들을 사나르는 일은 없을 거 같다. 지금 중국은 C뷰티가 대세라고 하니까.
어차피 명품 쇼핑을 할 생각은 없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티파니 매장으로 가보았다.
실버 팔찌가 있으면 사려고 했는데 ㅋ 아예 없다고 했다. 직원 수도 많지 않아서 고객 응대하기엔 부족해보였다.
큰손 고객에게 주력하는 느낌...
탑승 게이트에 도착했을 땐 이미 만보를 찍은 상태라 많이 지쳐있었고,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일단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설레는 마음은 아주 조금이었고 무서운 마음이 80%는 되었던 것 같다.
원래 해외 여행을 갈 땐 늘 무섭고 두려운 마음이 있는데 이번처럼 두려움이 컸던 적은 처음이다.
출국 일주일 전부터 두렵기도 했지만, 얼른 떠나버리고 싶은 마음이 컸다.
일단 일만 좀 쉬면 내 어깨도, 팔꿈치도, 손목도, 허리도, 침침한 눈도, 두통도, 불면증도, 손톱 뜯는 버릇도 무슨 병이든 다 고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정작 출국일이 되니까 뭔가 빠트린 것 같기도 하고, 누가 건드리면 눈물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심장은 미친듯이 뛰고....
어학원 등원 첫날과 하게 될 지도 모를 발표를 대비해서 구입했던 청심환이 너무나 필요한 기분이었지만 미래를 위해 꾹꾹 참았다.
마지막으로 엄마랑 전화를 하고 가족 단톡방에도 나 이제 출발한다고 메시지를 남겼는데 막내 동생이 물어본다 누나 어디가노? 누구랑 가노?
가족간 의사소통이 참 원활하고 좋다.
15만원을 추가하고 산 앞자리 좌석은 다리를 뻗을 수 있어서 좋았다.
요새 비행기에서 쓰려고 에어발받침 같은 걸 여행 준비물로 챙겨가는 경우가 많은 거 같은데 일단 국내 항공사에서는 금지되어 있다.
내 뒷좌석에서 그 문제로 승무원과 승객 사이에서 실랑이가 있었다.
예정된 시간보다 30분 정도 늦게 비행기가 출발했다.
6개월 동안 준비한 여정이 그다지 신나지는 않은 기분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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